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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걸음이라도 걸어야 한다

한반도의 대화 채널이 끊기고 적대적 구도가 일상이 된 지금, 평화를 '성과'가 아닌 '신실함'으로 바라보는 목소리가 나온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에도 제자리걸음이라도 걸어야 한다는 신앙적 주장이다.

정평정의로운평화 에디터·2026.10.15.

먼저 읽는 세 줄

  1. 1. 남북 대화 채널이 끊기고 적대적 언사가 일상이 된 한반도 정세의 경색.
  2. 2. 평화통일 담론 자체를 의심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이 평화의 의미인지 묻는 문제의식.
  3. 3. 기도와 신학적 증언, 탈핵·기후정의 가치를 밀어붙이며 '제자리걸음'의 신실함을 주장하는 방향.
제자리걸음이라도 걸어야 한다
이미지: Justice Peace News

- 한반도의 차가운 정세 속, 포기할 수 없는 평화의 신실함 -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의 시계가 차갑게 멈춰 서 있다. 남북 간의 대화 채널은 끊긴 지 오래고, 서로를 향한 적대적 언사와 군사적 긴장감은 일상의 영역까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 화해와 연대를 이야기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남북 관계는 경색되었고, 일각에서는 이제 '평화통일'이라는 담론 자체가 유효한가 하는 근본적인 회의론마저 머리를 든다.

그러나 신앙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평화는 단순히 정치적 정세나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온도가 달라지는 가변적인 상품이 아니다.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만물을 자기와 화해시키셨다”(골로새서 1:20)는 선언은, 세상이 아무리 깊은 갈등과 분열의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할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지금 남북 관계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단 한 번의 타결이나 화려한 정상회담의 수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눈앞의 장벽이 너무나 높고 단단하여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거룩한 답답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 단절의 시간 속에서도 우리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다짐이 있다. 바로 ‘제자리걸음이라도 걷는 것’이다.

폭설이 쏟아지고 눈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 한가운데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감아버리면 체온은 식고 생명은 끝난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제자리걸음이라도 걷는 행위는,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언젠가 눈보라가 그쳤을 때 다시 전진하기 위해 온몸으로 인내하는 생존의 몸짓이다.

남북 평화공존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대화가 막히고 교류가 끊겼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자리걸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반도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적대와 증오를 선동하는 세력에 맞서 평화적 공존의 당위성을 신학적으로, 시민사회적으로 끊임없이 증언하는 것이다. 군사적 대결이 아닌 인도적 연대와 생태적 평화—탈핵과 기후정의—의 가치가 남북 모두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잊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세상은 이를 두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지루한 반복’이라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언자적 소명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제자리걸음은 평화를 향한 최소한의 신실함(Faithfulness)이자, 막힌 담을 허무시는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거룩한 파수꾼의 발걸음이다.

갈라진 세상에서 화해와 연대를 일구는 일은 언제나 외롭고 고된 길이다. 그러나 우리가 제자리에서 발을 굴리며 체온을 유지하고 평화의 의지를 놓지 않는 한, 한반도의 평화공존을 향한 길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멈추어 서서 넘어지는 대신, 서로의 손을 잡고 제자리걸음이라도 걸으며 내일을 준비하는 평화의 일꾼들이 되기를 소망한다.